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경성 정치 (문단 편집) === 소수자 권리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음 === >서민 계급 출신자는 모두 [[동족혐오|서민의 적으로 돌아서 그들을 압박한다]]. >---- >-니콜라 샹포르(프랑스의 모럴리스트) 그리고 '억울해서 출세한' 이들이 있어도 소수자들의 '억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억울해서 출세한' 이들은 '출세해서' 더 이상 '억울하지 않고', "나도 출세했는데 너희들은 왜 출세를 못 하는가? '[[노오력]]'이 부족해서이다!"라는 식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주장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소수자라고 모두 이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그쪽 분야에서 리더가 됨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야망과 이기심도 겸비한 경우가 많은데, '억울해서 출세한' 자신이 출세한 결과로 얻은 열매를 다른 소수자와 나눈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선 진짜 '억울할' 수 있다. 둘째, 아무리 성공했어도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이 소수자에게 '성공'이란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데, 소수자가 자신의 성향을 '과시'하면 그나마 받고 있던 인간다운 대우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 이러한 점에서 세계적 기업 애플의 CEO인데도 불구하고 [[커밍아웃]]을 한 [[팀 쿡]]은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한다. 커밍아웃 동기가 “만약 애플 CEO가 게이라는 사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고 외로운 사람이 위안과 격려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생활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타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에서 소수자 중 성공한 이들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소수자의 하한선(문턱)'을 높이는 결과가 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 유대인]]을 들 수 있다. 미국 유대인들은 이주 당시 비교적 빈곤하고 차별받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열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지만, 그렇다고 미국 유대인들이 다 성공한 부자인 것도 아니다. 아직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식비가 부족해서 유대교 단체의 지원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상황에서 "미국 유대인들은 다 부자"라는 엉뚱한 편견이 퍼지고 가난한 서민 유대인은 돈이 많은데도 돈을 쓰지 않는 구두쇠로 매도당하는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https://cdn.fedweb.org/fed-42/2892/jewish-poverty-in-the-united-states%2520Weinberg%2520Report.pdf|#]] 미국 이외의 사례를 들자면 네덜란드 극우파들이 모로코계 이민자들과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들을 비교하면서 모로코계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인도네시아계 네덜란드인들은 상당수가 과거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이던 시절 식민 관료 혹은 그 혼혈 출신이고 오히려 일반적인 네덜란드인들보다 더 부유하고 교육받은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반이민 극우파들은 두 집단 평균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한 쪽은 네덜란드 사회에 잘 적응하는데 다른 편은 네덜란드 사회에 적응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스라엘 우파들은 자국의 아랍인 차별 문제를 [[팔레스타인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며 그 근거로 자국 내 극소수 [[체르케스인]] 혹은 [[무슬림 시오니즘]] 지지자들의 입장을 홍보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상황 하에서는 [[모범적 소수]]에 해당되는 체르케스인 공동체 역시 이스라엘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 내 이국적인 특이한 소수자 이웃으로 포장되는(즉 이스라엘 평균보다 더 높은 학력 수준 등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는 모순이 반복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2008년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에서 명명하는 법적 용어, ‘[[다문화가족]]’의 실질적 대상자인 국제결혼가정 중심의 ‘[[다문화]]’라는 ‘이름표 붙이기(labeling)’는, 한국사회에서 용인하는 소수자와 용인하지 않는 소수자를 구분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용인하는 소수자를 매개로 다수자 중심의 위계구조를 형성하며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 중에서 더 힘이 없는 약자-이를 테면, ‘집단화되지 못한 소수자’(전영평, 2007: 112)-를 방관하고 배제하는 구조를 만들어내었다.[* -양영자. (2015). 한국 다문화교육에서의 ‘모델 마이너리티’ 경향 고찰. 다문화와 평화, 9(3), 44-75.] 즉 '우리의 이웃'이 되어야 할 '우리 주변의 외국인'이 '우리'가 되지 못하고 주변화되어 '주변의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장애인을 소재로 한 [[인스피레이션 포르노]]가 있다. 결국 소수자의 '성공'은 결과적으로는 '성공'이 아니라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며, 이로 인해 차별적인 사회구조는 더욱 공고해진다. 물론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제대로 대우받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력은 이 영화(히든 피겨스)처럼 감동적이다. 하지만 사회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으려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주류의 인정을 받아야만 소수자가 인간다운 대우를 받는다면, 정말 사회가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오후, 같은 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